자업자득自業自得. 자기가 저지른 일의 과보(果報)를 자기 자신이 받는다는 뜻이다. 성인이 된 사람은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사자성어이다. 이 뜻은 흔히 '그 사람 업보지'와 같은 형식으로 어떤 '안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자주 쓰이는 언어다. 이전에 신문기사를 읽을 때도,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도 '자업자득이지 뭐~'라는 느낌으로 자업자득이란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흔히 좋은 일 또는 성공적인 일에 대해 '자업자득'이라는 단어를 쓰기보단, '자수성가'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용어를 사용한다.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가거나, 무단횡단을 하다 교통사고가 나거나, 맨날 친구 욕만 하고 다니던 애가 외톨이가 되거나, 매운 거만 먹다 위에 염증이 걸린 사람 등등 좋지 않은 일에 '자업자득'이라는 말을 자주 쓰며 이는 '업보'와 비슷한 의미로 쓰인다.
하지만 나는 오늘 '자업자득'의 좀 더 다른 측면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요즘 세상엔(?) 정말 다양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 같다. 이는 경쟁사회 혹은 비교사회라는 큰 문제점도 있지만 이보단 '교육'의 문제점이 가장 크다고 나는 생각한다. 도와줘야 한다는 것을 실질적으로 가르쳐주지 않을뿐더러 어떻게든 성적만 잘 받고 좋은 대학에 가길 바라는 세상이다. 그러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잘해주면 호구',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 등등의 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도 이러한 용어를 많이 사용했으며 그게 맞는 방향인 줄 알았다.
내가 나쁜 일을 당하거나, 불합리한 일을 당하면 인간이란 동물은 정말 나약해서 그런지 무엇보다도 '감정'이 앞선다. 여기서 말한 감정이란 복수, 열등감, 분노, 짜증, 우울 등등이다. 이런 감정을 느낀 사람들은 '여유'가 사라진다. (이 '여유'가 있고 없고의 중요성을 최근 느끼는 중이다.) 그래서 보인도 입장이 뒤바뀐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을 때 그들이 분노를 느꼈던 행동을 본인들도 똑같이 하는 모습을 정말로 많이 볼 수 있다. '나는 저 자리에 올라가면 저 사람들처럼 안 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그 자리에 직접 올라갔을 때 이전의 했던 이야기는 온데간데없이 행동한다. 분명 어느 정도 인지는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스스로 본인을 부정하며 속이는 것이다.
군대에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군대도 엄연한 하나의 위계질서를 가지고 있는 사회이고 어찌 보면 모든 사회는 비슷비슷할 것이기에... 또 군대뿐만 아니라 내가 소방서에 있을 때 직원들을 통해 본모습들도 정말 비슷했었어 80% 사회는 이와 비슷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도 엄청나게 폐쇄적인 나라이기에 말이다. 군대나 이런 사회생활을 하면서 '신입' 혹은 '뉴비'일 때만 느끼는 불만들이 있다. 선임이 괜히 갈군다는 느낌도 받을 때도 있고 나한테만 일을 잔뜩 시킨다 혹은 자기는 편하게 있으려 하고 눈치만 준다 등등의 감정들 말이다. 나는 이러한 감정들을 단순히 느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닌 그러한 감정들을 면밀히 관찰해 보려고 노력했다. '나도 과연 저 자리에 올라가면 안 그럴 자신이 있을까?' 또는 '저게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등등의 생각들 말이다.
이러한 생각을 해보고 안 해보고는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낸다고 생각한다. 나는 군대라는 집단이 너무 싫었어서 정말 굳게 마음을 먹었다. 내가 선임이 되거나 어떠한 권력을 가진 입장에 놓여있을 때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이다. 나도 시간이 지나 그 자리에 올라가니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권력 혹은 자리'를 통한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나도 그러한 유혹을 몇 번 받았기 때문이다. 내가 선임이니 후임에게 쉽게 시키거나 후임이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뭐라고 할 수 있는 처지였었다. 하지만 나는 정말 5번 아니 10번 이상 참고 또 참았다. 참는 게 능사는 아니다. 하지만 나도 결국 내가 편해지려고 그렇게 행동하다가는 내가 '비판했던 사람들'이랑 똑같은 사람이 된다는 게 너무나도 싫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어쩔 수 없다'라는 말을 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한다. '어쩔 수 없다'라는 말처럼 멍청하고 추한 말은 없는 것 같다. 세상에 '어쩔 수 없는 일'은 단 하나도 없다. 다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헛된 망상일 뿐. 물론 본인이 불만을 전혀 느끼고 있지 않는다면 이는 문제가 전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본인도 불만을 느끼고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모두가 그렇게 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정말 본인 스스로에게도 좋지 않은 일일 것이다.
지금부터가 오늘 이야기의 본론이다. 이 말을 하고 싶어 이렇게 빌드업을 했다. '본인 스스로에게도 좋지 않은 일'과 관련해서 자업자득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물론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닌 그렇게 살고 있는 중이다. '나에게 좋은 일'이란 무엇일까? 사실 말로 간단하게 정리하기엔 너무 어려운 개념이다. 좀 더 생각을 해보아야 하는 문제이다. 그래서 몇 가지의 예를 들어 설명할 예정이다.
첫 번째로 무단횡단을 들 수 있다. 내가 공부하고 있는 독서실 근처엔 직장인들이 정말 많이 있다. 그 거리에 정말 짧은 횡단보도가 하나 있다. 없어도 될 것 같지만 직장인이 많은 중심지기에 횡단보도와 신호등 있다. 얼마나 짧냐면 한 5걸음 정도만 걸으면 건널 수 있다. 그 신호등도 어떻게 보면 엄연한 사회 규칙이다. 하지만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차가 없으면 빨간불이어도 아무 거리낌 없이 무단횡단을 하는 것이다. '스몸비'처럼 핸드폰만 보며 걸어간다. 아무 죄책감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더 웃긴 건 몇 명이 안 건너가고 서 있으면 다른 사람도 와서 서 있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그러나 그중 한 명이 무단횡단을 하면 다 같이 하는 것이다. (나는 절대 안 건넌다.)
누구의 입장에선 5걸음 밖에 안되는데 차 없으면 후딱 건너가도 되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문제의 근원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이건 되겠지? 이 정도는 되겠지? 나 하나쯤은 괜찮겠지? 등등 자신만 편한 것을 중시하기에 다른 생각은 들지 않는 것이다. 왜 이렇게 각박하게 사냐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 부분이다. 만약 그러한 규칙들을 어기는 사람들이라면 그러한 사람들이 사회 문제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모순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본인들이 사회 문제의 근원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은 채 언론에서 떠드는 이야기만 사회문제라고 생각하는 꼴 아닌가?
두 번째 예로 분리수거가 있다. 우리 학교에도 분리수거를 하지 않는 학생이 너무나도 많다. 우리 학교만의 특징일 수도 있다. 학교뿐만 아니라 내 동네 중심지 거리에도 보면 분리수거를 한다는 개념 자체가 있는 건가 싶은 사람들도 너무 많이 있다. 지하철도 마찬가지이다. 카페 같은 데에서 테이크 아웃을 하면 컵홀더를 끼워준다. 이 컵홀더를 빼는 게 얼마나 귀찮을 일이라고 이걸 그냥 플라스틱 쓰레기통에 같이 버린다. 그런 사람들 특징이 '중국, 미국은 공장 만들어서 환경오염의 주범들인데 나하나 이거 버린다고 달라질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나 하나쯤이야'라는 추한 생각에 갇혀 합리화만 하며 살아간다. 본인이 이 순간을 살아가면서 무엇이 최선일까를 생각하기보다는 나만 중요하고 나의 편리함이 우선인 것이다. 사회는 개인들의 집합을 넘는 공동체이다. 그 속에 속한 개개인들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나가는 것인데 이를 무시하는 것인지 부정하는 것인지 모르겠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세 번째로, 복수심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 자신에게 해를 끼쳤다고 해서 똑같은 대우를 해주고 싶고 인과응보의 따라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그들이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일 수도 있다. 본성이라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사회만 둘러봐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복수심, 질투심 다 비슷한 의미로 썼다. 그러한 마음들은 쉽게 꺼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복수심, 질투심, 화를 느껴본 사람들은 누구나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막상 본인이 느낀 감정들에 대해 똑같은 감정을 타인에게 느끼게 해주고 싶어 행동을 해도 결국 본인만 불행해진다는 것을. '그때 왜 그랬지? 내가 더 참을걸'이라는 생각이 한 번쯤은 들었을 것이다.
네 번째로, 식당과 같은 서비스 업종을 예로 들 수 있다. 나는 솔직히 식당이 망하는 것이 정말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이다. 백종원의 골목식당을 정말 좋아했어서 자주 봤었는데 그곳에 나온 문제 있는 식당들은 식당을 영업하지 않는 내입장에서 보더라도 왜 망하고 장사가 안 되는지 알 수 있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물론 식자재 값 인상 등으로 타격을 입으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일단 '기본기'가 안되어있다. 요리 실력을 떠나 매장 청결상태, 음식에 대한 가치관, 위생에 대한 관념, 손님 응대 방식등 식당을 운영하는 사장님으로서 응당 갖춰야 하는 기본기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었다. 나도 가끔 서비스가 정말 처참한 식당에 갈 때가 있다. 그러면 다시는 가고 싶지 않다. 사장 입장에선 빨리빨리 돈 벌고 싶고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태도를 보면 평생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목표만 높은 것이다. 본인들이 이 순간에는 더 잃는 것 같더라도 베푸는 것이 '그들에게도 좋은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보통의 소비자들은 음식 맛이 정말 처참하지 않은 이상 어느 정도 맛있는 상태에서 서비스 혹은 손님 응대가 최상이라면 그 지역 사회에선 소문나기 마련이다. 서울처럼 대도시가 아닌 우리 지역만 하더라도 현재 잘 되는 집 혹은 맛집들을 보면 전부 그렇다. 서비스가 별로여도 잘되고 싶다면 맛이 최상이어야 가능한 일인데 이게 과연 더 쉬울까?
얼마 전 아버지께서 우리 집 근처에 새로 생긴 고깃집이 있어서 친구들과 방문을 하셨다고 했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도 전단지 광고를 엄청 했었다. 그 전단지에는 이 쿠폰을 들고 오시면 소주 한 병 무료라고 적혀있었다. 아버지는 친구분들과 밖에서 계시다 그 식당에 가느라 쿠폰을 챙겨가시지 못했다. 그래서 사장님께 전단지 보고 왔다고 말씀하시면서 소주 쿠폰을 놓고 왔다고 혹시 소주 하나 가능한지 물어봤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사장님이 '쿠폰 전단지 안 가져오셨으면 안 돼요'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정말 얼탱이가 없었다. 물론 쿠폰을 가져가는 게 정석이다. 하지만 내가 사장이었으면 절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도 오픈인데 말이다. 전단지를 보고 이 식당에 친구들을 데리고 찾아온 사람에게 서비스를 주지는 못할망정 그런 이야기를 했다니... 서비스를 달라고 떼를 쓰는 것이 아니다. 솔직히 식당에서 소주 한 병 서비스를 준다고 매출에 큰 타격은 없다. 하지만 소비자는 큰 타격을 입는다. 더 이상 그 식당은 안 가게 되고 다른데 더 맛 좋고 서비스 좋은 곳을 가면 된다. 내가 이상적인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단기적인 시야만 갖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본인 스스로도 모르는 건지 궁금하다. 오히려 모르고 있다면 다행이다.
무단 횡단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들은 본인에게도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 순간에는 편하겠지만 결국 그러한 '습관'들은 본인 스스로를 망칠 것이며 사회 문제를 일으키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분리수거도 마찬가지이다. 본인에겐 이 순간에 편하겠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땐 본인의 그런 '습관'들은 본인의 마음 또한 썩혀버릴 것이다. 복수심도 그렇다. 지금의 감정에 앞서 당사자에게 똑같은 대우를 해주지만 본인의 '여유'를 죽이는 일이 될 것이다. 식당 운영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단기적으로 조금이라도 더 벌려고 욕심을 부렸다간 대체제가 많은 시장에서 그곳을 찾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 것이고 얼마 안 가 망할 것이다. 그래 놓고 그들은 본인에게서 원인을 찾기보단 다른 데에서 찾을 것이다. 다른 식당 더 나아가 다른 일을 한다고 해서 과연 잘될까?
이처럼 '습관'과 '가치관'은 모든 일에 있어 중요하다. 그러한 '습관'과 '가치관'은 본인이 무슨 일을 하든지에 상관없이 그 성격대로 움직일 것이다. 어떠한 것을 해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습관이나 태도가 없는 사람들은 원인을 계속 다른 곳에서만 찾으려 할 것이다. 이러한 습관을 기르기 위해선 본인 스스로의 엄청난 통제와 노력이 필요하다. 나 하나쯤이야 라는 마인드에서 벗어나야 하고 지금의 편리함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이러한 것들을 포기할 수 없냐 있냐의 차이다. 포기할 수 없다면 본인들이 안 되는 원인 모두 본인들에게 있는 것임을 인지해야 하며 사회 문제의 주범 중 한 명이 본인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만 한다면 상관없다. 그러한 기본적인 태도도 없으면서 본인이 고결한 척을 하는 것이 본인 스스로에게도 부끄럽지 않은가?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고 실천하게 되면서 한층 삶이 '여유'로워 졌다. 내가 피해 보고 있다는 판단을 하지 않은 채. 그냥 그 순간에 내가 타인 혹은 세상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할 뿐이다. 장기적인 계획도 없다. 그냥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무단횡단하는 것이 본인에게 최선인 일인지, 분리수거를 하지 않는 습관이 최선인지, 복수와 질투를 하는 것이 최선인지, 서비스업에 종사하면서 단기적인 수익을 추구하는 게 최선인지 말이다. 위와 같은 예시 말고 정말 다양한 예시가 있지만 생각나는 것들만 써보았다. 현실에 이런 예시가 정말 많을 것이다. 새치기, 술주정, 과속, 음주운전, 사기, 범죄 등등 결국 본인들 스스로를 망치는 일일 것이다. 이것들이 과연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인가? 또 나 하나쯤이야라고 생각하고 넘길 것인가? 본인이 경쟁 사회와 비교 사회를 만드는 주범이 아닌가?
완벽을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 누구도 완벽해질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안 할 이유는 또 어디에 있는가? 지금은 잃는 것 같더라도 본인을 더 업그레이드시켜 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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