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야기할 '정의'는 정의(正義)가 아니고 정의(定義)다. 국어사전에 나온 정의(定義)의 의미는 어떤 말이나 사물의 뜻을 명백히 밝혀 규정함. 또는 그 뜻이다. (정의를 정의하다니 ㅋㅋ)
우리는 많은 것을 '정의하면서' 살아간다. 정의를 너무 사전적 의미로만 설명하면 글에 오류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아 간단히 말해 '어떠한 기준으로 의미를 부여한다'의 느낌으로 글을 쓸 예정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빨간색을 보고 "어 저건 빨간색이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키가 180cm가 넘는 사람이야, 저 사람은 착해, 산에서 뱀을 만나면 최대한 빨리 도망가야 해라고 기준을 정한 뒤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이렇게 어떤 대상 혹은 현상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또 정하는 이유는 '그게 살아가는데 편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매 순간 모든 대상과 현상들을 처음 보는 새로운 것들이라 생각한 뒤 판단을 내리는 과정을 겪어야만 한다. 얼마나 귀찮을까... 한두 번이야 그렇다 쳐도 모든 일이 일어날 때마다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고 정한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의 뇌는 터져버릴 것이다. (내가 뇌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래서 사회엔 법, 제도가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상황이 완벽하게 동일할 확률은 0에 수렴하기 때문에 법과 제도는 많은 논란의 대상이다. 하지만 장점도 있다. '일반화' 혹은 '정의의 과정'을 통해 사회를 더 편리하게 통제하고 유지할 수 있다. 법도 과연 전부 옳을까? 왜 대마초는 안 되는 프로포폴은 되는 것인가? 왜 담배는 되는데 프로포폴은 안 되는 것인가? 왜 코카인은 안되는데 설탕은 되는 것인가? (생쥐들은 코카인보다 설탕에 더 심각한 중독 증상을 보였다는 실험이 있다) 이처럼 뭔가 완벽한 것 같은 헌법이나 제도 같은 것도 까고 보면 전혀 완벽하지 않다. 그냥 정의하기 '나름'이다.
물컵을 쏟으면 물이 흐른다는 것을 '정의'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 사람은 매번 컵을 쏟아 물을 흘리고 청소를 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 사람을 바라보며 '바보' 혹은 지능이 떨어진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숙제나 업무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루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 사람은 어떤 강제적 상황이 닥쳐야만 그 일을 수행한다. 나는 전자의 상황이나 후자의 상황이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둘 다 바보 혹은 지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전자를 바보라 생각한다면 후자도 바보라 생각해야만 한다. (생각해야만 한다라고 얘기한 부분은 나만의 정의다.)
다시 정의의 문제로 돌아가보자. 정의의 문제는 기준의 문제랑도 맞닿아 있다. 어떤 말이나 사물의 뜻을 명백히 밝혀 규정하기 위해선 어떠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 정의의 사전적 의미 안에도 '규정'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뭔가 이상하지 않는가? '규정'의 사전적 뜻은 규칙으로 정함이다. 결국 규칙을 정한다는 것이 규정인데 규칙 자체도 정해야만 의미를 갖는 다. 그렇다면 이것이 진정한 규정의 뜻일까? 모두 다 '정한다'의 의미를 담고 있지만 '정한다'의 의미도 알고 보면 우리가 어떤 것을 정한다고 정해야 할지 정해야만 '정한다'도 의미를 갖는다.
자연의 언어라고 하는 수학마저도 결국 '정한 것'이다. 십진법 또한 우리가 정한 것 아닌가? 자연에 처음부터 존재하던 것이 아니다. 누군가 십진법이 쓰기 싫다고 정한다면 지금의 많은 수학과 물리학 내용은 그 사람에게 많은 의미를 줄 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용들이 말장난 같아 보일 수 있겠지만 이것이 지금의 세상이 진행되고 있는 방식이다.
우리는 각자마다의 '정의 틀'이 존재한다. 누구는 길거리에 침을 뱉는 사람을 보고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하는 반면 누구는 매너가 없다고 생각한다. 누구는 이 사람이 잘생겼는데 누구는 저 사람이 잘생겼다고 한다. 배가 아플 때 누구는 한의원엘 가야 한다고 하고 누구는 일반 병원에 가야 한다고 하고 누구는 민간요법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다른 예 하나를 들어보겠다. 임신한 지 14주 이내면 낙태를 할 수 있다는 법이 있다고 해보자. 14주가 방금 지난 14주 0.0001초일 때는 낙태를 못하는 것인가? 왜 그때는 낙태를 못하는 것인가 14주와 14주 0.0001초는 다른 것인가? 다르다면 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1초 차이는 어떤가? 이 초를 체감하거나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조금씩 초 차이를 줄 여가다 보면 0.0001초에 도달할 것이고 이후엔 0.01초 0.1초 1초에 다다를 것이다. 결국 14주와 14주 0.0001초가 그렇게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면 14주 1초도, 14주 1일도, 15주도 다를 바 없는 것 아닌가?
지금 말들이 비논리적이라고 생각한다면 논리적으로 설명을 해주길 바란다. 14주랑 15주는 크게 다르지라고 한다는 말에 나는 '크게'란 과연 어느 정도까지를 의미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더 나아가 모든 아이가 엄마 뱃속에 14주 있을 때의 모습이 전부 동일할까? 누구는 급속하게 성장해 있을 수도 있고 누구는 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1초 남들보다 더 늦게 성장해 있을 수도 있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해 줘도 논리 자체도 완벽하게 정의된 것이 아니기에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 누군가 정한 기준 혹은 어떤 집단이 정한 기준을 그 '뜻'에 맞게 이야기하는 것이지, 처음부터 정해진 것들은 단 하나도 없다.
지금까지 쓴 모든 말들 또한 나만의 논리고 생각이다. 그렇다면 이 글을 쓴 이유가 무엇일까? 나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정의' 문제에 조금 더 민감했다면 많은 사회적 문제, 갈등, 싸움이 덜 일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는 빨간색이 당신이 보는 빨간색이랑 동일한지 어떻게 아는가? 지금의 기술로는 절대 알지 못한다. 우리의 눈은 사람마다 전부 다르기 때문이다. 동일한 색종이를 보고도 각자 똑같은 색을 느꼈을 확률 또한 0에 수렴한다.
우리는 하나의 색상을 바라볼 때도 서로가 다르게 인식한다. 본인은 본인만의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나는 이렇게 하고 싶은데 쟤는 저렇게 하고 싶고, 나는 이 법안을 밀고 싶은데 저 사람은 이 법안을 밀고 있고. 나는 이 사업 아이템이 좋은 것 같은데 쟤는 이 사업 아이템이 좋다 하고. 나는 이런 뜻으로 말한 건데 쟤는 저런 뜻으로 받아들이고 등등. 타인과 내가 느끼는 것 보는 것이 동일하지 않을까라는 착각 때문에 즉 자신만의 정의 때문에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
이 글을 보고 한 번쯤 모두가 '정의'의 문제를 생각하며 10번 문제가 발생할 것을 5번으로 줄이면 참 좋지 않을까 싶다. 우린 같은 종족이라 할 수 있지만(이것도 사실 정한 것) 모두가 다른 존재다. 우리가 호랑이를 보며 자신처럼 행동하길 바라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타인을 바라볼 때도 이와 유사한 생각을 한다면 더 괜찮은 세상이 되어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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