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군대

내 인생 최대의 시련 part 6

LePetitPrinceHong 2023. 1. 23. 21:52

 두둥! 이제 '군대 시리즈' 끝이 보인다. 오늘 이야기 포함 2편이 남았다! 이제 약 1년 8개월간 소방서에서의 이야기를 해보겠다.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인상 깊었던 일들만 골라서 해볼 예정이다. let's go~

 소방학교에서의 마지막 날 밤은 정말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배치받는 소방서 분위기는 어떨지 궁금했고 지금까지 지내온 동기들과 진짜 이별을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그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아침에 우린 대청소를 하고 훈련소에서 가져온 더플백 짐과 핸드폰을 받았다. 이 날도 훈련소 때와 마찬가지로 휴대폰 느낌이 너무 새로웠다. 바로 가족, 여자친구와 연락을 하고 대강당에서 대기를 했다. 각 지역 별로 버스가 도착하면 그 도에 해당하는 의무소방원들이 빠져나갔다. 우리 지역 차는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왔어서 휑한 상태로 가게 됐다. 동기들과 막상 찐 이별시간을 가지니 눈물이 날 뻔했다. (이후, 단톡방에서 연락을 종종 하며 지냈었다. 그러나 한 번도 사적으로 모임을 가진 적은 없다... 한 번쯤은 보고 싶다.)

 버스를 타니 담당자님께서 배치서를 정확하게 알려주셨다. (이전에 알게 된 서 정보는 우리 도를 쓴 의방들 점수를 다 걷어서 확인했기에 알 수 있었다.) ㅋㅋ 나름 누가 꼬이게 써서 일 없는 소방서에 가길 바랐다... 나는 동기 한 명이랑 같이 가게 되었다. 그 동기는 소방학교 때 내 옆자리에 앉던 동기였는데(옆자리였긴 한데 그 당시 친하진 않았었다.) 또 만나게 되었다 ㅋㅋ 심지어 그 친구는 우리 도 쓴 사람들 중 성적 1등이었다. 나는 10등이었는데 같은 곳을,,, 그 친구도 나랑 같은 지역에 살아서 소방서가 엄청 가까웠다. 우리 도를 쓴 사람들 중에 우리 도에 살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았다. 나는 당연히 타 지역 애들이 교통 좋은 소방서를 쓸 줄 알았는데,,, 근데 이게 무슨 일? 다 시골을 갔다 ㅋㅋㅋㅋㅋ 하... 교통보다 업무가 없길 바랐던 것 같다. 나의 예상과는 너무 달랐어서 나는 가기 싫어했던 우리 지역에 가게 된 것이다...

 소방서에서의 1년 8개월의 삶은 정말 다사다난했다. 일단 의무소방 소방서는 서 by서가 심하기 때문에 모든 소방서가 이렇진 않을 거라는 점! 솔직히 이제 4개월 뒤면 마지막 의무소방 인원들도 전역을 하기 때문에 이런 글을 쓴다 해도 별 영향은 없을 것 같다.


1. 서 배치첫날 선임들이 파티를 열어줬다. 피자, 치킨 등 야식을 왕창 먹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선임들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으며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었다고 본다. 우리 서는 신입이 들어오면 파티를 했어서 나 이후에도 몇 번 파티를 했다. 의무소방이 사라지던 참이었지만 다행히 두 기수 모두 들어왔다. 후임 있는 게 어디,,,(없는 서도 있었다)

2. 선임들 중 최고선임이었던 2명은 나와 같은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ㅋㅋ 그래서 눈치도 보였지만 오히려 편했던 점도 많았다. 그 친구들 윗 선임까지는 군기가 엄청 심했었는데 그 동창들부터 점점 편해졌다. 막판에는 진짜 훨씬 더

3. 편의점도 자유였다. 택배도 마음대로 시킬 수 있었다. 의무소방 휴게실 앞에 쿠팡프레쉬 박스랑 쿠팡 쌓여있는 거 보고 충격,,,

4. 신입이 오면 몇몇 서는 폰을 선임들이 심하게는 한 달 이상 걷고 또 10시 이후에 모든 의방 일괄 반납을 확인하지만, 우리 서는 그렇지 않았다. 교육기간 3일만 폰을 밤에 반납했고(주중엔 썼다.) 그 이후부터 전역날까지 폰 한번 반납한 적 없었다 ㅋㅋㅋ 24시간 365 데이 풀 소지... ㅎㅎ 솔직히 개꿀서였다.

5. 의방 대기실 옆옆에 헬스장이 있었다. 8월부터 이용했는데 전역달까지 매일 이용했던 것 같다. 풀업머신, 레그프레스머신, 스미스머신, 벤치, 렛풀다운, 런닝머신, 거꾸리, 윗몸, 덤벨(종류별로 25kg까지) 싹 다 구비되어 있었다. 구조대 사람들도 많이 이용해서 그런지 헬스장 하나는 죽여줬다. 이때부터 한 운동이 지금까지 습관이 돼 일주일에 4~5일은 무조건 운동을 한다.

퀄리티 very 굳

6. 안마의자 휴게실도 있었다. 가끔 초반에는 자주 이용했지만 점점 이용하지 않았다.

세라젬까지 있었다 ㅋㅋ

7. 도서관도 있었다. 의방하면서 여기서 책을 엄청 읽었다. 나중에는 이북리더기까지 가져갔다. 군복무동안 약 80권은 읽은 것 같다. 할 게 없으니 책이라도,,,

여기서 시간을 제일 많이 보냈다.

8. 옥상도 개방되어 있어 여름이나 가을엔 옥상 노을을 보며 가족 또는 친구들과 전화를 자주 했다. 동기가 다른 센터로 파견 나가 혼자 있었을 때 선임 8명 사이에서 압박감을 느낄 때 자주 올라갔다. 군기는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8명은 힘들었다...

노을 진짜...

9. 대기실 말고 휴게실도 따로 있었다. 휴게실엔 냉장고, 전자레인지, 정수기, 책상, 침대 2개, 티비 1대, 컴퓨터 2대가 있었다ㅋㅋ 냉장고엔 달마다 마트에 가 사온 부식을 넣어놨다. 약 50만 원씩은 쓴 것 같다. 나중엔 선임이 커피머신까지 가져왔고 또 후임이 타 지역 사람인데도 컴퓨터를 가져왔다. 진짜 게이밍용이라 사양도 엄청 좋았고 재밌게 게임도 했다. 티비로는 유튜브도 보고 전역하기 한 달 전에는 월드컵도 봤다.

10. 배달음식도 자유였다. 아무 때나 아무 시간에 시켜 먹었다 ㅋㅋ 도심이라 없는 게 없었고 집에서 시켜 먹는 거처럼 편하게 먹었다. 초반에는 스트레스 때문인지 진짜 많이 시켜 먹었던 것 같다.

11. 근무시간 외 비번시간은 자유다. 아무도 터치를 안 하고 또 늦잠자도 됐다. 심지어 취침시간도 없었어서 마음대로 자면 됐다. 불침번은 당연히 없었다.

12. 근무날 때는 구급차 또는 화재차량 보조를 들어간다. 구급차 탈 때가 제일 싫고 화재차량이 꿀이다. 구급차 이야기는 아래에서 하겠다.

13. 화재차량은 거의 속보기 신고가 많았다. 화재현장을 가도 딱히 하는 일은 없었다. 고인목 놓기 호스 펴기 정도? 아, 한 번은 10시간짜리 화재를 갔었다. 이 날 폰도 깜빡 놓고 가 10시간 동안 멍 때리고 있었다... 밥도 도시락 신세

차가 진짜 무겁고 크다.

14. 아침은 7시 30분 점심은 11시 30분 저녁은 17시 30분. 식당에서 매번 나왔다. 음식은 맛있는 편이었던 것 같다. 음식물쓰레기 버리는 것도 우리가 했다. 

15. 청소는 의방 조 별로 했다. 월수금/화목/토/일 청소가 달랐다. 

16. 화장실과 샤워실이 리모델링 됐다. 내가 들어간 뒤 2주 뒤에 말이다. 심지어 세탁기 2대, 건조기 2대가 있었다. 직원들도 자주 썼는데 청소는 우리가 다 했다; 샤워실도 샤워부스 2개나 있고 깨끗했다.

건조기 개꿀
개운한 기억 뿐

17. 아침점호는 없었어도 오후 9시에 점호는 했다. 가끔 당직관님이 올라와서 야식도 사주셨다. 

18. 나는 약 8개월간 의무소방원 서무반장 역할을 맡아 휴가계획 작성 및 서류 관리를 했다. 이 덕분에 휴가 3박 4일을 더 받을 수 있었다.

19. 복무 중 코로나에 걸렸어서 1주일 추가 휴가를 받았었다. 진짜 개꿀이었다 ㅋㅋ 집에서 푹 쉬기~ 그러는 바람에 가족들도 다 걸렸다 ㅋㅋ

20. 휴가가 정말 많았다. 약 110일 정도 나온 것 같다. 일주일에 외출 1회는 따로다 ㅋㅋ 외출 때는 집에서 놀거나 여자친구를 만났다.

21. 선임들은 대체로 군기가 많이 없었고 착했다. 아직까지 연락하는 선임도 있고 최근엔 술도 마셨다. 전부 그렇진 않았지만 좋은 선임들을 만난 게 다행이었다.

22. 그런데 후임들 과의 관계는 썩 좋진 않았다. 전적으로 나의 후임 관리법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군대는 군기 없이 동등한 인격체로 끌려온 것이라는 마인드가 강했어서 그런지 후임들에게 군기를 잡고 싶지 않았다. 정말이다. 후임들은 어떻게 느꼈을 진 모르겠지만 할 건하자라는 마인드였다. 그래서 업무 측면 외엔 전부 터치를 안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랬는지 후임들이 사고를 너무 많이 쳤다,,, 나에게 잘해준 선임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내가 조금 관리를 했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무슨 방법이 정답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방식은 이상적이지 좋은 방법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상 소방서 생활이었다. 많이 자유로운 편이었다고 생각한다. 군대 끌려갔는데 불행 중 다행이지 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님ㅋㅋ


 우리의 가장 주된 업무는 구급차를 타고 보조하는 역할이었다. 우선 구급차에는 기관, 구급대원 1, 구급대원 2, 의방 또는 사회복무요원 이 탑승하였다. 구급대원 2명은 구급처치를 하는 역할이고 의방이나 사회복무요원은 들 것 이동 또는 옆에서 구급 처치 보조를 하는 역할이었다. 병원 도착 후 들것 이동을 도왔으며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니더라도 있으면 편한 정도의 느낌이었던 것 같다. 우리 의방들은 평소 구급대원 분들과 좋은 관계를 취하기가 힘들었다. 우리를 부려먹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솔직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최대한 일을 빼고 싶어 하는 반면, 구급대원들 쪽은 그렇지 않으니. 그러나 우리에게 잘 대해 주시는 구급대원들과는 어느 정도 친했다고 생각한다. 일기장이라 내 마음대로 쓰고 싶긴 하지만 아무래도 지나가던 구급대원이 보면 기분 상할 수도 있으니 최대한 좋은 기억만 떠올리며 말을 줄이겠다.

 구급활동을 하면서 병원을 정말 많이 가본 것 같다. 기타 출동 빼고 약 600건 이상은 출동을 나간 것 같은데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봤고 또 여러 가지 감정을 느꼈다. 생각보다 사회엔 생계가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으며 이전의 나의 삶이 정말 감사한 일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생계가 어려우신 분들을 적극적으로 도울 의지가 있었으니 가끔은 스트레스받는 일도 꽤 많았다. 구급대원과 우리를 무시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며 너무 무례한 사람들이 많았다. 구급대원들도 공무원이라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가끔은 선 넘는 환자들도 있었다. 그러한 환자들 몇 명 때문에 구급대원도 환자들에 대한 스탠스가 좋게 나가지 못할 때가 있는데,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사람이고 모두가 존중받아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수 도 없이 탄 구급차,,,

 구급활동일은 힘들었지만 나름 보람 있을 때도 많았다. 나도 의무소방 시험을 보고 구급차에 실려간 것을 생각하면 민망하다 ㅋㅋ 땀을 뻘뻘 흘리며 응급환자를 신속하게 처치한 후 병원에 신속히 데려다준 일도 많았으며 따뜻한 시민들의 감사 인사를 받을 땐 나도 행복해졌다.


 기억에 남는 구급 출동을 써보겠다. 자극적인 내용이 있을 수도 있으니 주의해서 읽길 바란다. 

1. 첫 출동으로 투신자살 환자 출동을 나갔었다. 안 그래도 자살은 힘든데 첫 출동으로 말이다... 아파트에서 떨어졌는데 화단으로 떨어져 큰 외상은 없었다. 머리에 피 조금과 다리랑 팔이 조금 꺾여있었다. 그 많은 피를 처음 봤고 피가 모여있던 모습은 슬라임 같았다. 나는 솔직히 충격을 받았었다. '자살에 대한 충격'이 아닌, '자살 환자를 살리는 것에 대한 충격'말이다.  구급대원은 사람을 살리는 게 우선이고 매뉴얼이 있기에 어쩔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자살 환자를 살리는 것'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이다. 일단, 무슨 이유가 있거나 간에 그들의 선택을 존중해주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이 자살을 택했고 그 사람이 살권리가 있듯, 죽을 권리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둘째로 살린다 하더라도, 불구로 살아남는 다면 우리가 정말 원망스러웠을 것 같다. 그 일이 얼마나 힘들지 우리는 가늠조차 안되는데 그냥 살린고 본다? 나는 철저하게 반대다. 이로 인해, 의방을 나올까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2. CPR을 정말 수도 없이 많이 해본 것 같다. 요양원, 가정집 등에서 심정지 환자가 많았기 때문에 정말 많이 해본 것 같다. 심정지 환자를 살리며 '하트세이버'라는 상을 준다. 나는 한 번도 받질 못했다. 기저질환이 있는 어르신들이 많았는데 정말 땀 흘리며 열심히 했지만 전부 돌아가셨다ㅠ. 하고 나면 정말 몸에 땀이 엄청나고 체력이 다 빠진다. 어떤 때는 2번 연속 심정지 환자를 나간 적이 있었는데 정신이 나갈뻔했다. 소방학교에서 이상한 시험 기계 애니로 하는 것과는 아예 체감이 다르다. 이건 실전이고 실전에선 생각보다 더 강하게 압박을 해야 했다. 갈비뼈가 부러지는 느낌을 많이 느꼈다. CPR을 여러 번 해본 것은 정말 큰 도움이었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사회에선 살면서 한번 해볼까 말까 아닌가.

3.  투신환자는 약 5명 정도 본 것 같은데 어르신, 중년, 중학생 등 나이가 정말 다양했다. 삶에 대한 회의감을 많이 느꼈으며 이러한 생각들이 발전해 나의 가치관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것 같다. 밖으로 튀어나온 뇌도 봤으며, 뼈가 부러져 살을 뚫고 나온 경우도 봤다.ㅠㅠ 지금생각해도 너무 맘이 아프고 안타깝다.

4. 구급차를 부르는 사람들 중 약 50%는 카카오택시를 착각하고 구급차를 부르나 할 정도로 위급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많았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냥 택시 타고 가거나 하면 될 거를 구급차가 무료라는 이유만으로 부르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이러한 사람들 때문에 진짜로 위급한 사람들을 태울 수 없을 때가 종종 있었다... 제발 그러지 말아 주세요,,,

5. 구급활동을 끝내고 가끔은 구급대원들께서 카페 테이크아웃을 해주셨다. 소소한 행복이지만 정말 좋았다. 중간에 먹다가 출동 나간 적도 엄청 많고 주문해 놨는데 출동한 적도 많았다 ㅋ


 이제 소방서 이야기가 끝이다. 진짜 힘들었지만 육군 가서 똥군기에 찌들어 살거나 가만히 쉬는 게 꼴 보기 싫어서 훈련을 받는 것이 아닌 사회에서 일어나는 실제 위급 상황에서 근무한 점이 정말 뿌듯하고 보람찼다. 강제로 보낸 시간들이지만 그중에서도 나름 의미 있는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일은 힘들었지만 그만큼 자유도 많았기에 의무소방 선택을 후회하진 않는다. 오히려 거기서 생활하면서 나의 가치관과 철학이 많이 바뀌었으며 인간관계에 대한 생각도 다시금 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과거는 미화된다'라는 말이 있지만 아직까진 나는 싫은 건 싫었고 좋은 건 좋았다는 생각이다.

다음 편은 마지막 편!